
20세기 최고 지성인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생전(生前)에 누구보다도
생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던 사람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는 죽을 때,
‘내가 돌아갈 고향이 어디 있는가?’를
부르짖으며 눈을 감지 못했다.
그는 마음의 고향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지만,
영혼의 고향에 대해선
전혀 대비(對備)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큰 병으로 신음하다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너무 두려워하자 죽음의 사자는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하고 돌아갔으나,
어느 날 죽음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아니 왜 또 기별(寄別) 없이 오셨습니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그 동안 너에게 여러 번 죽음의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가.
실패(失敗)도 보내고 고통도 보냈고,
나중에는 수없는 노화현상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그게 다 죽음의 사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죽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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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하는 관문(關門)이 바로 죽음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내 준비와 상관없이
예고(豫告) 없이 가야만 한다.
문제는 나를 부를 때 어떤 반응으로
죽음을 따라가느냐가 관건이다.
존 힌튼 박사가 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나름대로 개인적인 의와 선(善)을 통해
순간적인 마음의 안정감을
얻어내곤 했지만,
정작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한 순간에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적인 고향을 통해
많은 위로(慰勞)와 힘을 얻는 것처럼,
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옮김)
(고린도 후서 5:1) 만일 땅에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것이 아니요,하늘에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느니라.